[지상설교]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막 2:18-22)

관리자 승인 2025-02-21

                                                                                                                                                                                       이상호 목사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열심히 금식하였습니다
.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관점에서 남에게 잘 보이려고 외식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통해서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스승인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점점 많아지는 데 비해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은 점점 줄어들었으니, 금식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3:26)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처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비슷한 형태의 금식을 하고 있었지만 목적은 달랐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싸움을 시작하려고 요한의 제자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18절을 보면 논쟁을 걸어 온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랬다고만 했는데, (5:27 이하)에 보면 그들이 바리새인 족속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첫째는 지금이 잔칫날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주일 정도 혼인 잔치를 가졌습니다. 이 결혼식 때만큼은 금식 기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슬퍼하거나 금식하는 사람이 없었고,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이야말로 혼인 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부로서 신랑인 예수님과 혼인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혼인은 (62:5)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우리는 금식을 할 때가 있고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혼인 집 손님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수님 곧 신랑이 혼인 집 손님들과 함께 있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됩니다. 금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구원의 시대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율법과 같은 옛날의 방식을 절대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들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해야 할 때가 있으며 필요 없을 때가 있으며, 금식을 해도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알아주지 아니하는 금식은 어떤 것입니까? (58:4-5)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그런데 요한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다투기 위하여 금식 논쟁을 일으켰으니, 하나님은 이들의 금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금식의 1차적인 의미는 음식에 대한 철저한 절제(9:1)’입니다. 동의어로는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다(16:29)’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금식은 절망에 빠지거나 참회할 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구하며 시행되었으며(삼상 31:13), 포로기 이후 공동으로 금식이 준행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경건한 훈련(5:33)’을 의미하는데, 예수님께서도 금식 자체를 비난하신 적은 없으며, 단지 금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기 헌신의 표현이어야 하며,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6:16-18) 금식할 때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는 금식의 방법입니다.

  금식의 기본 정신은 (58:6,7)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간절하게 기도하되 힘들고 어렵고 죄악에 묶여 있는 자들의 회복을 위하는 길,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고 행동하는 것이 금식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두 번째로 생베 조각과 새포도주를 예화로 들고 있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해어짐이 더하게 되고,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발효가 진행되어 부대가 터져서 버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근본 정신을 무시한 채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던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처럼 유대교의 형식주의적인 외식과 시스템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묵은 포도주의 향과 맛에 취해 새 포도주를 거부하는 사람들처럼 새시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바꾸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바꾸러 오신 분이지, 적당히 기존 틀과 연합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구원의 시대에 금식이라는 낡은 유대 전통은 맞지 않습니다. 유대 전통은 하나님 나라를 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금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복음은 기존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조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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